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0엔 주화 (문단 편집) === 은화 === 100엔이 첫 선을 보인 해는 1957년(쇼와 32년)으로 당시에는 [[은화]]로 발행하였다. 일제 패망 이후 처음으로 만든 은화로 당시에는 봉황 도안으로 나왔었다. 위의 100엔 지폐를 대체할 목적으로 도입한 듯 하나 은화의 발행량 자체가 많지 않은 편이라 완전 대체하진 못하였다. 결국 은화와 지폐를 병행해서 사용하였다.[* [[홍콩 달러|홍콩]]에서 10달러 지폐와 동전을 함께 사용하는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00엔 지폐는 현재의 백동 100엔이 등장하고 나서야 유통정지되었다. 특이사항으로는 은화에 아연을 첨가했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통용 은화에는 구리만 섞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본에서는 아연까지 섞어 발행하였다.[* [[호주]]처럼 니켈까지 섞는 경우도 있으나 드문 케이스였다.] 100엔 은화가 등장하면서 [[10엔 주화|10엔]]과 [[50엔 주화|50엔]] 주화와 구별이 어려운 [[혼돈의 카오스]]가 열리게 되었다. 10엔과는 크기+톱니때문에 촉감상 구분하기 어려웠으며, 50엔은 색상이 은빛이라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결국 100엔 은화가 등장한지 2년만에 10엔은 톱니를 없앴으며, 50엔에는 구멍을 뚫었다. 정작 원인제공의 원흉 100엔은 스펙상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100엔도 디자인을 변경하였다. 100엔의 디자인을 변경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구멍뚫린 50엔과 더불어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었다. 결국 1959년(쇼와 34년)에 벼가 그려진 100엔 은화가 탄생하였다. 1966년까지 계속 벼도안으로 발행하였다. 1964년(쇼와 39년)에는 [[1964 도쿄 올림픽|도쿄 올림픽]] 개최 기념 100엔주화를 만들기도 했다. 일본 최초의 기념주화로 봉황, 벼도안의 100엔과 동일한 무게와 크기, 재질로 발행하였다. 뒷면(숫자 부분)도 벼도안과 위화감이 적게 디자인하여 시중에서도 많이 사용하였다. 다만, 당시에 올림픽 기념주화에 몰두한 나머지 일반 벼도안 100엔의 발행량이 줄어들었다. 따라서 쇼와 39년 벼도안 100엔 주화는 특년이[* 천만 개밖에 발행되지 않았다.] 되었다. 10년동안 발행하였던 은화는 결국 1967년(쇼와 42년)에 지금 쓰이는 100엔 백동화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은화를 포기하고 백동화로 바꾼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제조업계의 은 수요가 급증하면서 은값이 폭등했었다. 또한 [[미국]], [[네덜란드]] 등 통용 은화를 사용하던 나라들도 전부 니켈화, 백동화, 백동 도금 구리 주화 등으로 바꾸면서 은화를 포기하던 분위기였다. 일본의 [[자판기]] 수요까지 급증하면서 은화를 양산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